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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센터 소식

[국가인권위원회] “지금, 인권의 언어로 바꿔볼까요”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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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죠? OO이 코끼리 만지듯이…. 어느 부위를 만지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하죠. 물론 저는 OO은 아니지만…” 얼마 전 한 포럼의 발제자가 했던 말이다. 발표 중에도 OO이라는 말이 한 두 번 더 언급되었는데, 이런 비유를 마주할 때마다 식은땀이 흐른다. ‘OO’이란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350여 명이 모인 포럼장은 사람들의 엄청난 호응으로 흘러갔고, 그 순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인권의 언어로 바꿔볼까요”

 

언어는 차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장애와 관련한 언어가 그렇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무능하며, 무가치한 것을 표현할 때 관습처럼 소환된다.

 

물론 놀람이나 격정적 반응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특정 집단을 상징적 도구로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번처럼 장애와 관련한 비유는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장애인을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순간은 ‘전체를 볼 수 없는 존재’로 시각장애인을 위치시키고 있었다. 사실 그 순간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순간’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것이다. 350여 명 중 누군가가 그 비유를 또 인용한다면, 미디어를 통해 퍼져간다면 정말 어떻게 될까?

 

1999년에 출간된 「일곱 마리 눈먼 생쥐(SEVEN BLIND MICE)」라는 그림책이 있다. 칼데콧 아너 상을 받은 작품으로 번역본이 출간된 후 꾸준히 읽히는데, 이 책 역시 “OO이 코끼리 만지듯”이란 관습적 비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일곱 번째로 탐색에 나선 생쥐가 코끼리를 맞힐 수 있었던 건 장애와 상관없이, 앞서 다녀온 생쥐들의 의견과 자신의 탐색 결과를 추리하여 정리했기 때문이다. 생쥐들은 색깔만 다를 뿐, 책의 마지막 장에는 ‘참된 지혜는 전체를 보는 데서 나온다!’라고 교훈도 적어놨으니, 전체를 파악하는 건 장애가 있든 없든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접근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가도 혹시 이 그림책이 오래된 편견을 다시 불러온 건 아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검은 안경을 낀 사람들이 코끼리를 더듬는 듯한 이미지가 잊을만하면 여기저기 나타난다. 바로 2월의 그 날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뿌리내린 편견은 질기고 단단해서 차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지나온 시간 이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인권교육이 필요하다. 인권의 가치에 기반하여 일상을 되짚어보고, 문제를 발견하며, 개선안을 찾아 실천할 수 있을 때 편견은 물러나고 차별은 멈출 수 있다. 인권교육은 교차로의 신호등처럼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잠시 멈추어 생각할 시간을 준다. 그 멈춤의 시간이 없다면 사람들은 익숙한 길로만 갈 것이다. 멈춤의 시간은 그동안 스쳐 지나간 여러 일을 다시 인권의 관점에서 풀어보게 한다. 왜 누군가는 농담에 웃을 수 없었는지, 왜 누군가는 키오스크를 이용할 수 없었는지, 왜 누군가는 학교를 중단해야 했는지 등을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결국, 인권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기준임을 알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권교육은 모두를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조건과 경험의 차이로 인해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 2월 그 포럼이 있던 날로 돌아가 인권의 언어로 원고를 검토할 수 있다면, “OO이 코끼리 만지듯”이란 비유가 아니어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만 보는 것은 어렵지 않겠죠. 그럼 숲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는 “지금 우리는 이 물건의 앞면만 보고 있는데요. 입체적으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지금 보고 있는 조각들을 모두 합치면 무엇이 될까요?”와 같은 방식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특정 집단을 비유의 자리에 세우지 않고도 말이다. 하지만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익숙한 차별의 언어를 인권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모두를 위해, 인권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오래된 관습적 비유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될 테니까.

 

인권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내가 그 비유의 대상이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면 된다. 그 상상이 불편하다면, 왜 불편한지 스스로 묻는 것이다. 그 질문 하나가 인권의 시작이다. 소소해 보이는 성찰이 내 안에 쌓일 때, 인권은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스며들어 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나의 주변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과정이 인권교육이기도 하다. 인권교육은 조금 더 안전한 환경에서 세상의 익숙함을 돌아보고,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으며, 더 나은 공동체가 되도록 돕는다.

 

하루 한 번, 익숙한 것에 질문해 보거나 당연한 것에서 한 걸음 벗어나 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인권을 향한 걸음이 될 수 있다. 혼자보다 함께라면 그 걸음은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 지금 인권의 언어로 바꿔볼까요?

 

1) 포럼의 발제자가 사용한 ‘장님’이란 용어는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로써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표현이므로 ‘OO’으로 대체 표기함.

 

 

글_ 박병은 ㅣ 모든사람_인권교육연구단체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humanrights.go.kr/webzine/webzineListAndDetail?issueNo=7611928&boardNo=761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