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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센터 소식

[국가인권위원회] 영화 읽는 시간 - 힘을 낼 시간

  • 이은지
  • 2025-02-06
  • 32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 <힘을 낼 시간>은 이른 나이에 ‘실패한 아이돌’의 꼬리표를 단 20대 청춘들의 로드무비이자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아이돌에 관한 영화다. 아이돌의 인권을 다루는 이 영화는 주인공들의 담담한 내레이션을 통해 거대한 K-POP 산업의 이면을 들춰본다. 제3자의 통렬한 고발이 아닌 당사자들이 힘겹게 꺼낸 고백. 이 고백은 묵직하고 아프다. 하지만 고백은 치유의 힘을 지닌다. 꽁꽁 숨겨온 속마음을 뱉을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힘을 낼 시간>을 만든 남궁선 감독은 열심히 꿈을 좇다 좌절한 청춘들에게 당신들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었다고 따뜻하게 토닥인다.

 

힘을 낼 시간

 

전직 아이돌이었던 수민(최성은), 사랑(하서윤), 태희(현우석)는 제주도에 도착한다. 자신들만의 뒤늦은 수학여행을 계획하고 제주도에 왔지만 이들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다. 수민의 내레이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어렵다. 서툴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다시 그 세상에 섞여 들어갈 수 있을까.” 십대 때부터 아이돌 연습생으로 살아온 이들은 학창시절 평범한 학생들이 누리던 많은 것들을 누리지 못했다. 수학여행도 마찬가지. 그러나 여행은 처음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사랑은 버스에 캐리어를 놓고 내리고, 식당에선 옆자리 손님들과 폭행 사건에 휘말린다. 정확히는, 그들이 자신을 험담했다고 오해한 사랑이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언제나 사건을 수습하는 건 수민이다. 수민은 한때 사랑과 함께 몸담았던 아이돌 그룹 ‘러브 앤 리즈’의 리더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차분하게 잘잘못을 따지기도 전에 수민은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사과가 가장 빠른 길이다.” 아이돌은 구설수에 오르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여행 경비 98만원을 합의금으로 모두 써버린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귤 농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농장 주인의 우려와 달리 이들은 일을 척척 해낸다.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다. 예의도 바르다(인사를 할 땐 무조건 90도로 허리를 숙인다). 새참 시간엔 노래와 춤으로 흐뭇하게 분위기를 띄운다. 몸에 밴 습관은 무섭다. 아이돌 생활을 하며 몸에 밴 습관들은 이들이 어떤 시간을 통과하며 살았는지 짐작하게 한다. 일상적인 일처리에 익숙지 않은 사랑과 달리 수민의 행동에선 무엇이든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진다. 귤 농장에서도 수민은 쓰러질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아니, 그건 미련함이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책임지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돌볼 줄 모른다. 수민에겐 섭식 장애가 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먹은 것을 토해낸다. 체중조절이 일상인 삶을 10년 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선정적인 가사의 노래가 흥행하자 의상은 점점 짧아졌고 피임약을 먹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고작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그래야 성공하는 줄 알았으니까. 한편 해체한 남자 아이돌 그룹 ‘파이브 갓 차일드’의 멤버였던 태희는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다.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쳐도 팬서비스를 하듯 미소 짓는다. 괴로워도 슬퍼도 웃어야 한다는 강박, 좋은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태희는 말한다. “관심 받는 것이 좋았고 웃음을 주는 게 좋았다”고. 하지만 관심과 웃음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컸다. 신인 시절엔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상처받았고, 지금은 팀은 망했는데 계약기간은 남은 이상한 상황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언제쯤 발을 뺄 수 있을까.” 불공정한 계약은 태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힘을 낼 시간

 

“정산 처음 받아봐.” 귤 농장에서 일한 뒤, 일당이 든 부푼 봉투를 손에 쥔 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에 따른 보상이라는 상식적 체계가 이들에겐 어쩐지 낯설다. 오랜 시간 아이돌의 세계에서 고강도의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수행했지만 귤 농장에서와 같은 정직한 정산은 받아보지 못 했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큰돈을 벌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그간의 노동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세계. 그것이 불공정하다고 느껴도 성공하지 못한 아이돌, 더군다나 아이돌 연습생은 소속사와 싸울 힘이 없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은 정산뿐만이 아니다. 수민과 사랑과 태희는 함께 아이돌의 꿈을 키웠던 친구를 잃었다. 한때 ‘러브 앤 리즈’에서 수민과 사랑과 동고동락했던 멤버는 간결하고 슬픈 두 문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내가 여기 있다.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다.” ‘여기 있다’라는 존재의 서술에 주목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묘사에 주목하면 이 유언은 이렇게 들린다. 아이돌은 상품이 아닌 사람이라고. 그저 보기 좋은 인형이 아니고, 함부로 평가해도 좋은 상품이 아니라고. 개성과 인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힘을 낼 시간

 

2024년 9월 국회에서 ‘아이돌 분야 아동·청소년 인권 실태 조명 국회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전 틴탑 멤버 방민수는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투명하지 못한 정산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큰 문제”라며 “주목받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99%의 아이돌”들이 불공정한 계약의 피해를 본다고 말했다. 전 브레이브걸스 멤버 노혜란은 “아이돌은 을의 입장이다. 회사가 정한 방향을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라 본인의 의견이나 생각은 묵살되기 쉽다”며 결정권과 자생력을 가지기 힘든 상황을 지적했다. 전 단발머리의 멤버 허유정은 “회사는 미성년자인 아이돌 연습생을 보호할 책임이 있지만 교육적 지도를 할 사람이 없다”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미성년 연습생의 처우를 언급했다. <힘을 낼 시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결코 과장된 픽션이 아니다.

 

영화는 허무맹랑한 기적으로 주인공들을 성공 궤도에 올려놓는 대신 어렵게 새로운 출발선에 선 인물들을 보듬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언니, 지금은 힘을 낼 시간이야.” 사고뭉치 막내 사랑의 대사처럼 꿈을 좇던 시간, 방황하던 시간,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시간을 지나 이젠 정말 힘을 낼 시간이 왔다. 붙잡을 수 없지만 간직할 수 있고, 간직하기 싫어도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시간을 통과한 이들은 세찬 바람 앞에서도 꿋꿋할 것이다. 다시 한번, 지금은 힘을 낼 시간이다.

 

힘을 낼 시간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humanrights.go.kr/webzine/webzineListAndDetail?issueNo=7610863&boardNo=7610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