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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경쟁, 그 최전방에서 신세계를 열어가다 김명찬 인텔코리아 CEO 김명찬 동문을 만나기로 한 시간. 사장실로 곧 안내를 받겠거니 생각하며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작은 회의실. 김명찬 동문은 사장실을 따로 두고 있지 않았다. 대개의 외국계열 회사가 그러하듯 유연한 기업문화의 한 단면이려니 생각하면서도 회사 대표가 직원들과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한다는 사실이 사뭇 신선하기만 했다. 입사 13년 만에 최고경영자로 김명찬 동문이 인텔코리아의 대표로 선임된 것은 지난 2001년 3월. 88년에 입사한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고속승진이었다. 40대에 외국기업 CEO에 오른 비결이 무엇일까. “세일즈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동안 리셀러, 아키텍처 영업 등 다양한 기술영업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시장과 고객을 보는 안목을 갖췄다고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인텔이라는 회사의 비전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성장해 온 정통 인텔맨이다. 채널관리, 재판매 부문, 아키텍쳐 세일즈, 투자 담당 상무를 거치면서 한 계단씩 CEO로서의 능력을 준비해온 것이다. 세계적 기업을 이끌어가는 힘, 집중하는 마음 인텔은 시장 점유율85∼90%를 차지하는 중앙처리장치(CPU) 최대 메이커다. 전 세계 45개국에 85,000여명의 직원이 움직이고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미국의 본사 외에도 중국, 일본, 대만 등 전 세계에 75개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5년간 세계를 바꿔 온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 혁명을 이끄는 기술을 개발해온 회사답게 최근에는 인터넷 무선 접속을 가능케 하는 통합칩을 출시하고, CPU 4기가도 개발해냈다. 이런 세계적인 기업의 한국지사를 이끌어가는 김명찬 동문의 다짐은 그래서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강한 리더십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CEO가 되고 싶다며 인격과 위험관리능력, 판단력, 예지력의 중요성도 늘 잊지 않는 덕목이라고 한다.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는 앤디 그로브의 말은 제 일과 삶을 이끌어주는 격언과도 같습니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전 회장이다. 그의 확고한 사업철학과 삶의 자세에서 배울 점이 많고, 그래서 존경한다고. 김 동문은 그 말이 품은 뜻처럼 항상 고객에 집중하는 비즈니스를 펼치려 한단다. 그것이 곧 인텔코리아 대표로서의 신념이기도 하다. 새롭게 기획되어 추진되는 일의 전 과정마다 무섭도록 몰두하며 일을 풀어나가는 힘이야 말로 김 동문의 오늘을 만들어 온 산파였다. 꿈처럼 다가올 내일, 그 중심에 서서 아무리 빨리 앞서가도 결코 쉴 수가 없는 것이 CPU의 발전속도이고, 김명찬 동문을 비롯한 직원들은 이 속도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지난 3월엔 인텔R&D센터 발족식이 있었다. 인텔코리아에게는 그 속도의 경쟁에서 더 앞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센터에서는 디지털홈과 무선인터넷 분야 기술이 개발될 예정이며, 본사에서 20여명이 파견돼 앞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인텔 본사가 해외에 새운 연구개발센터 가운데 디지털홈에 초점을 맞춘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머지않아 이 센터에서 우리들 삶의 방식과 세상의 풍경을 바꿔놓을 신기술이 움트게 될 것이며, 그 중심엔 김명찬 동문이 서 있다. 30년 전, 원천골 실험실에서 꿈을 키우던 한 전자공학도가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의 핵심이 되었다. 이제 그가 새롭게 펼쳐가는 기술경영의 진면목을 기대해 본다. 꿈처럼 다가올 신세계를 그려보면서 말이다. 김명찬 인텔코리아 대표 1978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1983~1987 LG상사 1988~2000 인텔코리아 영업부 시스템 세일즈 엔지니어, RCO Area(리셀러 영업부) 세일즈매니저, IA(인텔 아키텍처) 세일즈 이사, 상무 2001.3. 인텔코리아 대표 2004. 4. 정보통신의 날, 국무총리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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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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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너지학자, 아주의 에너지로 미래를 달리다 최기련 교수(대학원 에너지학과, 산학협력단장)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누구에겐가, 또 어디엔가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더군다나 일생에 걸쳐 그러한 나눔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에너지학자, 최기련교수. 30년 넘게 빚어온 학자로서의 그의 그릇 안에는 세상 곳곳에 뿌려주고도 마르지 않을 샘이 담겨 있는 듯하다. 1973년부터 이어져 온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 우리나라 에너지 연구의 역사와 함께 한 그의 학문적 성과와 경험의 폭은 분명, 한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만한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에너지분야, 이만한 사람 또 어디 있을까 70년대 초반 서울대 공대시절, 데모하며 사회운동을 극렬하게 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술 마시며 낭만을 즐길만한 호방함도 없었다는 최교수는 자신이 당당하게 잘 해낼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또 길이 없더라도 부딪히는 과정에서 가치를 얻고자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외환은행 재직시절,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74년부터 장기자원대책위원회에 파견근무를 한 것이 에너지와의 첫 번 째 인연이었다. 그 후로 한국동력자원연구소에서,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또 한국전력공사에서 에너지와 관련된 숱한 연구를 진행하며 기획안을 제시하면서 황금 같은 경험과 실력을 쌓아왔고,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프랑스에서의 에너지경제학 공부는 이런 그에게 더 큰 날개를 달아주었다. 점차 국내에서 진행되는 대형프로젝트의 대부분이 에너지분야에서 이뤄지는 이유로 최교수가 참여하는 국책 프로젝트의 수도 늘어만 갔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선도기술(G7)의 기획자문 위원장은 그 스스로도 만족스런 성과를 이루며 마무리한 자리였다. 아주대학교 에너지학과 개설, 최고의 보람 30년이 넘는 외길인생 동안 최교수의 기억에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국전력에서의 일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86년 당시엔 장기외채의 반이 전력부분에서 일어날 정도로 전력부분에 대한 과잉투자가 논란거리였단다. 해결책으로 한전과 원자력연구소는 2001년까지 원자력발전소를 최소 33기를 지어야 한다고 했고, 최교수는 11기만 지어도 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반복되는 의견과 논리 대결 끝에 최교수가 설득에 성공했다. 발전소 1기에 5조원이었으니, 대략 100조원 정도를 아낄 수 있었던 것. 에너지경제학을 공부해온 학자로서 더 없는 보람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최교수가 두고두고 최고의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대학교 대학원과정에 에너지학과를 개설한 것이다. 88년 그 당시만 해도 에너지분야 전문가가 터무니없이 부족할 때였고,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그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아주대학교 에너지학과는 학부에는 없고 대학원에만 개설된 당시로서는 국내 유일의 학과였다. 지금 돌이켜봐도, 과감하게 투자를 해준 대우학원이 우리나라 대학원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생각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최 교수는 그동안 18명의 석·박사를 배출해 냈고, 현재 박사과정 7명과 석사과정 4명을 지도중이다. 그는 아주대 에너지학과를 학생들의 등록금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대학으로 만들겠다는 것는 꿈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학과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 받아 외부에서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럴 만큼 충분한 실력도 있고 자신도 있단다. 효과적인 기술혁신의 룰 만들고 싶어 요즘 최교수를 가장 바쁘게 하는 일은 아무래도 산학협련단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지난 3월, 산학협력단장으로 선임되었다. 올해부터 산학협력단장의 이름으로 학교의 모든 연구과제협약을 담당해야 하고, 수익사업도 유치해야 한다. "국제경쟁력을갖추는 대학이 되려면 등록금의존도가 낮아야 하는데, 산학협력단의 역할이 공고해진다면, 그래서 수익창출을 하여 학교의 투자여력이 높아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는 아주대가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2년 동안 바삐 움직여야 한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인다. 이렇게 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아주대학교 산학협력단장을 하면서 또 한가지 꿈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기술혁신이 투자를 하는 만큼 잘 안 이뤄지고 있는데, 앞으로 기술혁신이 잘 될 수 있는 룰을 세팅하는 것’이라며, 이것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하는 학자의 포부이기도 하단다. 지금까지 최 교수를 이끌어 온 힘은 무엇일까. “매주 빠짐없이 북한산에 갑니다. 힘드니까 오르지요 그래서 오를 맛이 나요.” 이 한마디로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까. 쉬운 길보다는 험하고 굴곡 있는 길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니, 아무래도 도전하면서 이뤄내는 길이 최 교수의 길이요, 또 오늘을 있게 한 에너지원인 듯하다 최기련 교수 학력 및 경력 1966.3~1973.8: 서울대 공과대학 자원공학과(공학사) 1979.5~1982.12: 프랑스 Grenoble대학원(에너지경제학 박사) 1973.8~1978.5: 한국외환은행(조사부 조사역) 1978.5~1986.6: 한국동력자원연구소(에너지정책연구부장) 1986.6~1987.2: 에너지경제연구원(에너지정책연구부장, 연구위원) 1987.3~1988.4: 한국전력공사(사장 정책담당 특별보좌역) 1988.4~1989.9: 아주대 교수(대학원 에너지학과) 1989.9~1994.9: 에너지자원기술개발지원센터 소장 1992.2~2004.2: 선도기술(G7) 기획자문 위원회 위원장 1994.9~현재: 아주대 교수(대학원 에너지학과) 겸 아주대부설 에너지기후변화연구소 소장, 산학협력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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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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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2학년 때 문과·이과로 반을 나눴다. 15반 가운데 이공계는 2학급뿐이었다. 지망생이 그만큼 적었다. 여학생이 수학에 약하다는 생각에 이 쏠림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혹시 주변 사람들이나 그들 스스로 수학 재능을 얕잡아 보게 된 건 아니었을까 진짜 성적이 남학생보다 낮았더라도 이 또한 오래 동안 자신감이 없었던 탓은 아니었을까 이성은 남성과, 감성은 여성과 짝지워져 왔으니 말이다. 여성 수학자들마저 이런 편견 때문에 고달프다고 한다. 남성 중심의 학문에서 그들은 소수자였다. 이제 제 목소리를 내보자고 한국여성수리학회는 지난달 21일~23일 제1회 여성수학자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번 학회에 참석했던 린 월링(48) 콜로라도주립대 수학과 학과장과 고계원(53) 아주대 교수가 지난 22일 서울 고등과학원에서 만나 다르면서도 같은 경험을 나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훌륭한 여성학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랜 세월 남성과 여성 모두를 현혹시킨 ‘거짓 명제’를 깰 수 있었단다. 영어를 녹음해 풀어야 한다니 이건 정말 곤혹스러웠다. 익명을 원한 통역자가 도와줬지만 그래도 홀로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앉아 있어야 하는 외로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데 기자야 괴롭건 말건 영어로 통하는 두 사람은 벌써 동무 같았다.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사람은 “정말 좋은 의견”이라며 반겼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알아들어 분위기 짐작은 대충했다. 화기애애한 듯해 마음이 놓였다. 고계원=먼저 미국 수학계에서 여성이 놓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린 월링=수십년 동안 많이 개선되었죠. 이제는 많은 여성 수학자들이 종신교수를 맡고 있어요. 여성은 수학을 못 한다는 이야기를 덜 듣게 됐어요. 예전엔 학술회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여성은 좋은 수학교사는 될 수 있지만 연구자로서는 부족한 면이 많다는 이야기들이죠. 이젠 최소한 수학을 하려는 젊은이에게 그런 말로 용기를 잃게 하지는 않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매우 멀어요. 지난 10~15년 동안 매년 미국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가운데 20~30%가 여성입니다. 그런데 연구중심 대학에서 종신교수가 된 사람 가운데 3~5%만 여성이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수학계에 발을 내딛지만 계속 연구하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어요. 학술회의에 가면 소수의 여성이 연사로 나오고 어떤 때는 한명도 없죠. 연사로 나와도 기조연설을 맡지는 못해요. 여전히 소외되는 셈이죠. 수학계에서 여성들은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이것이 그들이 계속 연구하는 데 장애가 되죠. 제가 미국과학재단에서 프로그램 단장으로 일하며 느낀 것은 여성들이 연구비 지원신청조차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한해에는 제가 연구제안서 100개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단지 3개만 여성이 쓴 것이었어요. 고=수학계에 서 차지하는 여성의 위상이란 측면에서 한국이 미국보다 15년 정도 뒤처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따라잡는 데 15년이 걸린다는 건 아니죠. 1980년 초에 대학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해 수학교수들이 필요했어요. 그땐 남성이 모자라 여성도 채용했죠. 이후엔 채용하는 여성 수가 점점 줄었어요. 그런데 1~2년 전부터 변화가 보이는 것 같아요. 큰 규모 대학들이 여성교수의 채용을 시작하는 것 같아요. 좋은 징조입니다. 월링/“여성은 재능 없다고 남성들이 말해왔기 때문” 월링=정부의 어떤 압력이 있었나요 고=정부에서는 2~3년 전에 전체 국립대 교수자리 가운데 200개를 여성에게 따로 주고 3년 안에 고용하도록 했어요. 그러나 못 채운 대학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월링=바라는 결과를 효과적으로 얻는 데 필요한 최소 인원이 있죠. 여성 수학자 1명을 채용하는 데 몇년이 걸리면 언제 그 수에 도달할 수 있겠어요 한명 겨우 채용했는데 그가 낙담해 그만두거나 직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면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도 200명이라는 수가 매우 인상적이네요. 린/점점더 많이 발을 내딛지만 계속 연구하는 사람 찾기힘들어 고/수학계에서 여성의 위상 한국이 15년 뒤쳐진것 같다 고=200명은 국립대학 모든 학과 교수를 말하는 거예요. 수학에는 2~3자리 정도랍니다. 월링=아 그런가요 수학과에만 200명이 필요한데요. 제가 미국 과학재단에서 일할 때 흥미로운 경험을 했어요. 여성들이 쓴 좋은 제안서를 찾아 연구비를 주는 게 프로그램 단장의 중요한 구실이었죠. 그런 경험은 저에게 많은 용기를 줬죠. 과학재단에서는 이공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96년에 아쉽게 끝난 프로그램이지만 여성교수 교환제라는 게 있었죠. 그리고 제가 운 좋게 교환교수 자리를 얻게 됐어요. 여성교수들은 명성 있는 대학의 학과로 가게 되고 프로그램에서는 1년 동안 급여를 대죠. 대학쪽에서는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비용을 재단에서 내고 연구비 지원 인센티브도 주니까 허용해요. 저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가게 됐고 대학원생을 가르쳤죠.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위가 향상됐고, 연구할 기회도 많아졌다고 평가해요. 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변했다더군요. 고=여성교수로서 학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월링=그럼요. 특히 남학생에게 영향을 주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수학계 대부분이 남성이고 우리는 그들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고=한국과학재단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연구비 지원할 때 여성이 낸 제안서에는 100점 만점에서 5점을 가산점으로 주죠. 월링=제안서를 검토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성차별 의식 탓에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점수를 덜 받는 현상을 만회해 주려는 것이군요. 고=점수를 더 준다고 해서 혜택을 받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생색내기용 점수란 생각도 들죠. 그 점수 덕에 연구비를 땄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노력을 보인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겠죠. 학계에 성차별이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또 여성에게만 줄 수 있는 연구비지원금도 따로 있죠. 그러나 교환교수제 같은 것을 포함해 여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네요. 월링=제가 과학재단 프로그램 단장으로 여러 제안서를 검토하면서 느낀 게 있어요. 여성들의 제안서는 남성들 것과 달랐죠. 매우 겸손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더군요. 자신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자기가 낸 제안서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부족한 것처럼 보였죠. 전 여성들에게 제안서를 검수 받는 걸 권합니다. 그래서 “될 수도 있다”는 표현을 “될 것이다”로 바꿔줘야 해요. 그리고 자신의 열정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검토하는 사람들은 열정에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이죠. 고=한 국의 경우, 여성 수학자 가운데 몇명이나 한국과학재단에 연구비 지원을 신청하는지 통계조차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극소수만 신청하는 것 같아요. 제안서를 쓰기 전에 워크숍이 필요해요. 여성뿐만 아니라 젊은 남성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특히 여성들이 너무 겸손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말에 강한 인상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을 개선해야겠죠.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는 편견 때문에 스스로 위축됐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제가 미국 대학에서 가르칠 때 여학생들이 결코 남학생들한테 뒤지지 않았어요. 수업에 여학생이 많을 땐 질문도 많이 하고 활발했죠. 아주 날카로운 질문도 잘했고 성적도 좋았어요. 그런데 남학생이 있는 반에서 남학생들이 질문을 주도하기 시작하면 여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을 펼치지 못했어요. 월 링=맞아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어떤 수업시간에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주위를 둘러보니까 남학생들은 다 알아듣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거예요. 질문했더니 교수가 바보 취급하더군요. 그래서 수업 끝난 다음 남학생들한테 너희는 다 이해했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들도 하나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 저랑 비슷했던 거죠. 문화적 차이가 클 텐데도 수학계 소수자로서 겪는 고민은 비슷했다. ‘확신과 관심의 부족’,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여성연구자들의 굴레였다. 비단 수학계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전진하는 데는 그만큼 지원이 필요하고, 자신감을 가지려면 박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주장도 해 버릇해야 느는데, 여성에겐 기회가 부족했다. 월링=최근 설립된 한국여성수리과학회가 그런 구실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그러려면 재원이 필요한데…. 문제는 역시 돈이겠죠. 월링=미국수학회는 수학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데 많은 기여를 했어요. 모든 행사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성들이 어떤 구실을 하도록 강제하는 내부 규칙이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따를 수밖에 없었죠. 고=한국수학회의 경우, 중요 직책을 맡은 여성은 한명뿐이죠. 여성의 참여를 유도하려는 노력은 있는 것 같지만, 직책을 맡기더라도 여성에게 실제로 주어지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10년 전에는 당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채용 안 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지금 그렇게 말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직도 그런 감정이 남아있죠. 여성들도 정책결정에 적극적이지 않았죠. 하지만 여성수리과학회 출범으로 변하게 될 거예요. 여성수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조금씩 개선되겠죠. 린/자신감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확신이 부족한 것처럼‥ 고/여성들이 너무 겸손해 연구비지원 극소수만 신청 월링=미국여성수학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여성수학자를 위한 포럼을 개최해 정보 교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죠. 여성 수학자들에게 그런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수학은 수백년 동안 남성들이 우월한 세계로 여겨졌으니까요. 포럼에서 여성들이 모여 지식이나 살아 남는 방법,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서로 알려줄 수 있죠. 미국여성수학회는 과학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여행경비를 제공해 대학원생이나 박사후 과정을 밟는 학생들이 학술대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죠. 많은 여성들이 지방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자리 잡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더 소외감을 느낄 수 있어요. 연구 공동체로부터 점점 멀어질 가능성이 크죠. 학술회의에 가면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의욕이 생기니까 수학자로서 발전하는데 중요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네트워크와 공동체를 만드는 게 필요해요. 수학계의 여성이 느끼는 것은 소수 민족이 느끼는 차별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고계원 “전적으로 일에 전념할수 없어 양육때문에‥문화때문에‥” 고=특히 한국 수학계에서 여성은 더 소외되기 쉽죠. 우선 문화 차이 때문에 여성이 남성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상황이 있어요. 예를 들면, 남성 수학자들이 함께 술 마시러 갈 때 가사까지 병행해야 하는 여성들은 같이 갈 시간이 없죠. 또 남성 수학자들도 여성에겐 같이 가자고 자연스럽게 제안을 잘 못해요. 결국 잘 어울릴 수가 없게 되죠. 제 또래나 젊은 여성 수학자들을 보면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성학자들보다 못할 것이 없죠. 그런데 그들이 미국에 있을 때는 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았는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별로 좋은 자리를 잡지 못했죠. 양육 때문에 여성 수학자들이 전적으로 일에 전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한국의 상황과 문화 때문에 연구공동체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참 중요해요. 여성 수학자들도 자신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성들끼리 학회를 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를 느끼며 이번 학술대회에 온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참석해보니 생각이 달려졌다고 해요. 수많은 훌륭한 여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생겼다더군요. 이렇게 여성수학자가 많은 학술대회에 참가하면 자신이 여성이라는 자각이 생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죠. 여성수학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점점 남성화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 같아요. 또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모범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한국여성수리학회가 해야 할 가장 큰 구실은 연대의 느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번 학술회의에는 80명에서 100명 정도 참석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170명 정도 왔어요. “나도 저렇게 됐으면…” 역할모델을 발견하면 꿈이 구체화된다. 거기까지 가는 방법도 보인다. 그 모델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면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들의 방식은 독특했다. “정말요 대단하네요!” 과장된 몸짓으로 긍정을 표현했다. 대화 중간 중간 웃음도 맛깔스레 끼워넣었다. 서로에게 “너의 말은 내게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를 비언어적 방식으로도 전달하고 있었다. 월링=미국에서도 공부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계기로 연구자로 성숙할 수 있었나요? 고=스탠퍼드 대학에서 공부했어요. 17년 동안 미국에 살았다는 게 다른 관점을 얻는 데 도움이 됐죠. 첫번째 계기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생겼어요. 어떤 사람이 제 논문을 읽고 자신의 학교 와서 세미나를 해보라고 초청했어요. 제가 머뭇거리니까 만약에 사정이 어려워서 그런 거라면 이해하지만 발표하는 게 두려워서라면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발표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발표했고 청중한테 많은 질문을 받았어요. 이렇게 제가 하는 수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두번째는 제가 조교수일 때였어요. 복도에서 한 교수가 저를 세우더니 미국과학재단에 연구비 지원신청을 했냐고 묻더군요. 저는 신청을 해도 연구비를 못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교수는 이건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받든 못 받든 신청해야 한다고 말했죠. 그래서 신청했고 기대도 안했는데 받게 됐어요. 심사자들의 평가가 굉장히 좋아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린/운좋게도 아버지가 수학선생 학교다닐때도 여자애들이 잘했다 고/주위에서 볼수있는건 거의 남성 여성 역할모델 찾기 힘들어 월링=그게 여성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반응이죠. 고=여러 사람들의 성원과 관심이 기뻤고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경험이 자신감을 갖게 해줬어요. 정말 내가 수학 연구에서 무언가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 말이죠. 그전엔 제가 수학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거죠. 월링=저도 당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재미로 대학원에 갔어요. 제가 박사학위를 따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다보니 오기가 생겼죠. 계속 이쪽 일을 하게 됐죠. 놀라왔던 건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죠. 저의 지도교수는 제가 독립적이길 바랐고 저를 완전히 신뢰했죠. 고=지도교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도교수는 학생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돼요. 그 사람의 믿음이 큰 역할을 하니까요. 월링=그 지도교수는 저를 끊임 없이 도전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믿어줘서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지도교수의 지침을 따라서 한 게 아니라 제 아이디어와 힘으로 끝까지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저는 처음에 두려워서 연구직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도교수는 정말 화를 냈죠. 그 뒤에 한 학회에서 고교 교사 출신의 한 여성 수학자를 만났죠. 자신감에 차 있고 다른 사람들과 더 편하게 수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죠. 그는 저의 영웅이 됐어요.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어요. 그가 수학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걸 보고 저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점점 많은 학술대회, 워크숍에 참여하게 됐어요. 고=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 월링=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죠. 그래서 여성수학자들이 더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여성 수학자들은 다른 여성들과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자신만의 경험인지 수학계 여성 대부분이 겪는 경험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죠. 사실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게 많은데도 말이에요. 고=사람들은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워요. 월링=자신에게 적절한 목표를 세울 수 있게 되죠. 여성이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여성들이 주로 자기비하를 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린월링 “수학계 여성이 느끼는 것은 소수민족이 느끼는 차별과 비슷” 고=그런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왜 여성수학자들은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것 같으세요 월링=너무 오랫동안 남성들이 지배해 왔던 직업이고 그들이 항상 여성들은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없다라고 말해왔기 때문이죠. 그 생각이 뿌리내려 우리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 좋게도 아버지가 수학선생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우리학교 여자아이들이 수학을 참 잘해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대학에 와서 편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고=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편견 속에서 자라지 않아 수학을 더 잘하게 된 것 같아요. 월링=연구직에 이르러 그런 편견에 더 부닥치게 되죠. 특히 연구직에서는 여성 역할모델을 찾기가 힘들어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건 거의 남성들이죠. 다른 여성들이 연구에 대해서 발표하면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고 가능하다고 여기게 되죠. 같은 여성이니까요. 이건 참 무의식적인 것 같아요. “할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죠. 고 =제가 스탠퍼드에서 공부할 때 학과장이 대학원에 있었던 여학생 5명에게 질문했어요. 박사과정을 마치는 데 자신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냐구요. 스탠퍼드 수학과는 저희 위로 13년 동안 여성 박사를 배출하지 못했거든요. 그땐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죠. 제가 한국에서 학부를 다닐 때는 여성이 별로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게 한국에서는 당연해 보였으니까요. 그때 질문을 받은 한 학생은 적극적으로 여자교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저는 수학을 잘하긴 했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서 수학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걸 생각 못했습니다. 대학원에 가면 그냥 가는 거지 특별한 목표를 갖지 않았어요. 제가 직장을 가지고 나서야 그 교수의 질문을 이해하게 됐죠. 뒤늦게 깨달아가며 여성들이 수학계에서 겪는 어려움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수학을 잘 했지만 별로 자신감이 없었죠. 박사학위 과정에서 아기를 낳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죠. 또 여성수학자의 역할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찾기 어려웠죠. 특히 외국인으로서요. 린/포럼에서 여성들이 모여 살아남는 방법을 서로 알려줘야 고/수학공동체 자체가 점점 위축 연구비도 적고 일자리도 적고 월링=제가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을 때 수학과 여교수가 저를 포함해 딱 2명이었는데 둘 다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게 됐어요. 그해에 석사과정에 여학생이 한명 있었는데 우리가 모두 떠나자 포기하려 했죠. 1년 뒤 돌아와 그 학생 이야기를 들으니 혼자 다 해야 했을 때도 자신이 얼마나 수학을 사랑하는지는 느꼈지만, 주변에 여성이 활약하는 걸 보는 게 더 도움이 된다더군요. 그는 박사학위까지 하기로 결정을 했죠. 그런데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여성이 없고 또 사람들이 여성을 채용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대요. 그러니 자신이 왜 이 고생을 하면서 이 일을 해야 되는지 회의하게 됐다더군요. 고=한국에서는 박사후 연구과정에 있는 사람들의 3분의1 정도가 여성인데, 정식 교수가 되는 사람은 3분의1이 안 되죠. 갑자기 어느 단계에 이르면 여성이 사라져버리는 느낌이 들어요. 월링=학술회의에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에게 발표를 하도록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참여를 지속적으로 유도할 수 있으니까요. 고=게다가 한국에서는 수학과 자체가 폐쇄되기도 하죠. 정보통신이나 컴퓨터 공학과로 흡수되는 경향도 있고요. 한국에서는 다른 이공계는 여러 곳에서 연구비를 지원 받을 수 있지만 수학과는 한국과학재단과 학술진흥재단에만 연구비를 기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과학재단에서도 미국과는 달리 수학에 대한 지원이 다른 분야에 비해 아주 적습니다. 연구비도 적고, 일자리도 적고…. 걱정이에요. 월링=수학은 다른 이공계 분야의 밑바탕인데 수학에 인재가 없으면 어떻게 다른 분야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고=요즘 한국 정부는 교수의 20%를 여성으로 채우는 5개년계획을 만들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산이 마련되지 않아 실행 가능성은 두고봐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 교수들도 많이 있는 것 같고요. 월링=미국에 서 90년대에 수학계에서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도 남성 수학자들이 불평을 많이 했어요. 여성들이 우리 일자리를 뺏어간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죠 원래 남성들만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아니고 여성이 일자리를 두개씩 차지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은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없기 때문에 말로 하지는 못합니다. 또 여성들 실력이 뛰어나니까 남성들이 불평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속 생각은 다를지 모르죠. 최근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성차별적인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는 데 놀랐어요. 미국에서는 똑같은 실력을 가진 경우라면 소수민족이거나 여성에게 가산점을 줘야 한다는 권고사항이 있지만,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에 별로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여성 쿼터제 등에 대해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알아야 돼요. 여성은 지금까지 항상 차별 받아왔다는 걸요. (*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한국여성수리학회 회장인 고계원교수와 콜로라도주립대 수학과 학과장인 린 월링교수의 특별대담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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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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