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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원생들은 방학이 되면 국제경영연수를 떠난다. 지난 1월 한 팀이 일본으로 갔다. 오사카와 교토 지역의 기업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경험한 이야기다. 일행 중에 딸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식 일정을 피해 개인적으로 오사카 대학 방문에 나섰다. 교통편을 생각하다가 일단 택시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택시요금이 무진 비싸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먼저 기사에게 오사카 대학까지 얼마쯤 나오겠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한 15분쯤 갈 테니 2천500엔쯤 나올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 정도 요금이라면 세 사람이라 다른 교통수단을 굳이 이용할 필요가 없다 싶어 택시를 탔다. 그런데 목적지를 3, 4㎞ 남겨두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택시 기사가 그냥 미터기를 꺾어버리는 것이었다. 미터기에 요금이 2천500엔으로 찍혔던 그 시점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아까 호텔에서 제가 2천500엔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제가 그 요금만 받겠습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일행은 모두 깜짝 놀랐다. 아니 2천500엔 받겠다고 약정을 한 것도 아니고, 그쯤 나올 것이라 이야기한 것뿐인데… 그 기사는 손님에게 기대를 심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필자도 일본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택시를 타고 공항을 가는데 시간에 쫓기어 빨리 좀 가자고 했다. 기사는 친절하게 "하이!"해 놓고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보행자도 없는데 빨간불도 좀 통과하고, 제한속도도 좀 어겼으면 했지만 고지식하게 룰을 다 지키고 가는 것이었다. 답답해서 넌지시 한번더 운을 떼 보았다. 반응은 여전히 똑 같았다. "우리는 프로라서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 아슬아슬한 경우가 많다. 속도위반은 다반사고, 신호위반, 유턴위반도 마다않는다. "아저씨 좀 심하지 않습니까?"하고 한마디 하면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우리는 프로 아닌가, 당신네들과 같은 아마추어 하고는 달라." 일본의 프로는 규칙을 지키는 걸로 자부심을 갖는데 우리네 프로는 규칙을 어기는 걸로 \\'보람\\'을 느끼는 걸까? 처칠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처칠이 급해서 기사에게 좀 속도를 내라고 했다. 그랬더니 런던 경찰이 잡지를 않는가. 기사는 조용히 경찰에게 "뒤에 앉은 분이 누군지 모르는가? 처칠 수상님이시다." 그런데 경찰은 "우리 수상님 차가 속도위반을 할 리가 없다"면서 \\'딱지\\'를 떼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보던 처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경찰의 행동이 가상해 보였다. 나중에 런던 경찰청장을 불러 사연을 이야기하고 성실하게 근무를 하고 있는 그 경찰을 찾아서 표창을 해주라 하였다. 경찰청장은 "수상님, 런던 경찰은 모두 그렇게 근무하는데, 그럼 모두를 표창하라는 말씀입니까?"고 되묻는 것이었다. 영어로 직업을 나타내는 단어가 여럿 있다. job, occupation, vocation, calling, career, business 등 말이다. Profession도 직업을 나타내는 단어의 하나다. 그런데 프로페션은 다른 단어와는 달리 고급기능이나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직업을 말한다. 의사, 변호사 같은 직업 말이다. 사회가 발달하다 보니 이제는 프로페션도 숫자가 무척 많아졌다. 그 종사자인 프로(professional)도 흔해졌다. 또 프로는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와 구별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프로에게는 프로정신(professionalism)이 있다는 것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소양이나 방법론, 나아가서는 철학을 뜻한다. 프로정신이 제대로 섰을 때 사회적인 신뢰가 형성되고 사회적 시스템이 고도화된다. 프로는 일단 기량이 높다. 그러나 기량이 높다고 프로는 아니다. 프로로서의 윤리의식 즉 프로페셔널리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프로선수들이 승부를 조작하고, 변호사가 고객을 속이고, 판사가 막말을 하고, 공직자가 업무상 얻은 정보로 투자를 하고… 택시기사나 버스기사들이 당연히 교통규칙을 위반하는 사회는 그만큼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사회인 것이다. [경인일보 - 201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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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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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가까이 있는 동네 목욕탕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이른 새벽에 다니다 보니 어린 아이나 젊은 층보다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과 중 장년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가면 으레 마주치는 몰상식한 이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들어오자마자 몸을 씻지 않은 채 바로 욕조 탕 속으로 뛰어들거나 지저분한 수건을 물이 넘치는 욕조 언저리에 던져놓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칫솔을 입에 물고 샤워기 물을 튼 채 서서 한없이 이를 닦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한 마디 해주고 싶지만 새벽부터 무슨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참다 보니 점차 신경이 무뎌지게 되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겪었던 황당한 일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새벽 시간이지만 가끔은 집에 못 들어가고 함께 외박을 한 대학생이나 젊은 회사원들이 어울려 오는 경우도 있다. 그날도 젊은이 서너 명이 들어와 한참을 시끌벅적하더니 그 중 한 명이 내가 혼자 앉아있는 건식사우나 방에 들어왔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바닥에 가래침을 내뱉었다.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아니, 거기다 침을 뱉으면 어떻게 하나. 여러 사람이 쓰는 밀폐된 방이잖아. 당장 물 떠와서 닦아내게!” 내 질책 소리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끝까지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었다. 반항하는 것도 반성하는 것도 아닌, 마치 선생님께 야단맞는 학생처럼. 존경할 어른이 사라진 요즘 사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걸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함께 살아가면서 모르거나 잘못된 것을 보면 가르쳐주고 바로잡아주면 된다. 그런데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경우라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기본적인 훈련이 안 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 염치고 체면이고 모두 던져버리고 모두가 자기 편한 대로만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런 세상은 지옥이나 연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요즘 우리 주변에는 어른이 없다. 언제부턴가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줄 어른들이 사라져버렸다. 세상살이에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깨우치게 해주는 모범으로서의 어른의 존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효율과 능력만을 따지는 사회에서 인성이나 품성 같은 것들은 잊힌 지 오래다. 이미 우리 가정의 부모들은 물론 학교의 선생님들조차 스승으로서의 역할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그 원인이나 책임이 어디에 있든 간에 우리는 이미 걸어야 할 바른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고 말았다. 오늘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젊었을 때 스스로 만들었던 덫에 치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딱한 존재가 되어 뒷방으로 물러났다. 노인들 사회 참여 기회 주어져야 그래서 어른이 없는, 어른을 부정하는 세상 속에서 자라 성장한 오늘의 지도층이라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는 물론 학교사회의 교육자, 어린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 국민이 모두 반인륜, 반도덕의 오물통 속에 거꾸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처지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이를 한탄하거나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하기보다는 그 정확한 원인과 올바른 해법을 찾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의학 발달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평균 수명 1백세 시대에 이미 진입했다고도 한다. 노인들 스스로 존엄성을 찾을 수 있도록 예우하고 재교육과 정책적 지원 등을 통해 보호함은 물론 가정과 사회, 학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단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활동을 통해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다시 어른이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참 어른이 있고, 그 어른을 공경하고 따르는 사회 그 속에 우리의 밝은 미래가 있다. [경기일보 - 201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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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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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폭력으로 신음하고 있다. 학생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는 급우를 왕따시키고, ‘일진’이 어느 학생에게 폭력을 가하면 피해 학생은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가하는 ‘폭력의 연쇄’가 일어난다. 한 학생을 여러 명이 집단으로 구타하고, 여학생을 남학생들이 성폭행하고, 폭력의 희생자는 때로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끔찍한 일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경찰청은 사이버 폭력 수사대로 엄정 대처하겠다 선포하고, 교과부장관은 학교폭력을 은폐하는 교장을 엄단하겠다고 윽박지르고, 대통령은 학교폭력을 밝히는 교장을 칭찬해야 한다고 달랬다. 이러는 동안 여러 학생이 같은 동네에 사는 한 학생을 감금 구타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자랑스럽게 찍은 사건이 보도됐다. 청소년의 48%가 학교폭력을 경험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한 요즘, 경찰청의 선포, 교과부장관의 윽박지름, 대통령의 지시로 학교폭력문제가 해결되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짝 대책도 필요하겠지만 참된 대책은 학생, 교사, 학부모, 사회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인권감성을 키우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이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학생들은 이라크 포로들을 고문하며 즐거워하는 미군병사를 연상시킨다. 잔인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이 학생들은 가학증자인가. 아닐 것이다. 단지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억압되었기 때문인데, 어린 그들을 불감증자로 만든 것은 학교, 가정, 사회, 정부이다. 성적제일주의 교육이 타자의 인권을 공감하는 인권감성으로 거듭나야한다. 우리나라는 젠더(gender), 재산, 가문, 사회적 출신 등과 상관없이 기본권을 보장할 것을 규정하는 ‘세계인권선언,’ ‘국제인권규약,’ ‘유엔어린이·청소년권리조약’을 비준한 나라다. 우리 교육의 기본도 성적 경쟁과 서열화가 아니라 성적, 외모, 재산, 젠더, 피부색이 다른 타자를 존중하는 인권교육이 돼야 한다. 그런데 헌법 6조에 의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 국제인권규약을 비준한 한국 정부의 기관인 교과부가 국제 상식으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다. 서울교육청이 발표한 서울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무효소송을 낸 것이다. 체벌 금지,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반대하는 일부 여론 때문인데, 성 정체성에 따른 차별의 금지나 신체의 자유의 보장은 인권보장의 기본이다. 인권을 모르는 인권불감증은 대학에서도 후배에 대한 선배의 폭력, 여학생에 대한 남학생의 성추행, 제자에 대한 교수의 성추행 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부의 신’으로 불리는 고대 의대생들이 몇 년간 같이 공부한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사진 촬영해 사회를 경악케 한 사건은 인권감성교육 하나 제대로 없는 초중고, 그리고 대학 현실을 볼 때 전혀 경악할 일이 아니다. 인권감성은 교수에게도 필요하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주인공 김명호 전 성대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은 “학생에 대한 교수·연구 및 생활 지도에 대한 능력과 실적, 교육관계법령의 준수 및 기타 교원으로서 품위 유지\\'부분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연구업적이 좋고, 학생들과 축구하기를 좋아했지만, 학점주기에 엄격하고 동료교수와 잘 어울리지 못해 불편함을 일으키는 타자, 즉 ‘왕따’인 그를 대학은 배척했다. 지금 초중고뿐 아니라 대학 모두가 인권불감증에 걸려 있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와 교수도 인권불감증에 걸려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업적경쟁에 앞서 인권감성 재활치료를 받아야 할 시점이다. 인권감성 없는 곳엔 참된 교육도 행복한 사회도 불가능하다. [한국대학신문 - 201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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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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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1월15일, 거란의 공격으로 발해의 수도 상경성(上京城)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1천86년이 흘러 바로 며칠 뒤면 그 날이다. 비운의 마지막 왕 대인선과 왕족, 귀족, 관료 등 수많은 발해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뿔뿔이 흩어졌고, 200여년간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명성을 떨치던 발해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들이 기록한 자료는 남아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최근의 지표조사나 발굴 등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유물, 유적들이 다소 있을 뿐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 관련 내용은 ‘요사(遼史)’, ‘거란국사(契丹國史)’ 등 중국 측 사서에 전하는 불과 얼마 안 되는 분량의 내용이 전부이다. 발해에 대한 여러 의문들 이러한 연유로 발해 왕조의 건국과 멸망 등에 관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등 그 주체 세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연 발해는 고구려계 지배세력과 거란, 여진, 말갈 등 피지배 토착세력의 이중구조로 존재하였는가.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경쟁관계였는가, 적대관계였는가.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발해 멸망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나아가 발해 멸망 이후 요동(遼東) 만주일대, 송화강 하류, 흑룡강 동북 지역에 펼쳐져 있던 광활한 땅과 그 역사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인가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 답변해줄 준비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다. 다행히 우리의 역사기록인 ‘고려사’에는 고려로 이주해온 발해유민에 관한 풍부한 사례들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발해 멸망 직전인 925년 9월에 100호가 이주해온 것을 시작으로 12월에 1천호, 934년에 대광현이 인솔한 수만 명이 몰려왔다. 그 이후 979년에 다시 수만 명, 1029년부터 1040년 무렵까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씩 집단적으로 이주해왔으며, 1116년과 1117년 2차에 걸쳐 1백 명 가까운 발해인들이 고려로 이주해왔다. 우리 안의 5%는 발해인 당시 고려 총 인구 210만명의 5%에 달하는 10만명 이상이 발해에서 이주해온 유민이었다. 이는 고려시대 400여년간 이주해온 중국계, 거란·여진 등 북방계, 몽골계, 동남아계, 일본계, 기타 서역(西域) 등 수많은 귀화인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고려로 이주해온 초기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서북 지역에 배치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의 압박이 차츰 심해지자 고려는 거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발해 유민들의 거란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거란군과의 전투 경험을 이용하였고, 이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019년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효용가치를 잃게 된 이들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남쪽으로 내려가 중남부지방의 벽지 촌락마을에 살게 되었다. 발해 왕족인 대씨가 상주군 관내 영순현에 정착하여 살던 중 13세기 몽고와의 항쟁에서 그 후손들이 공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영순 태씨로 그 존재를 확고히 한 것이다. 그 밖의 발해 유민들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고려인이 되었을 것이다. 피부색이 서로 다른 귀화인의 경우라 해도 보통 5대가 지나면 귀화한 국가의 인종으로 완전히 동화된다고 하는데 발해인의 경우 유전인자는 물론 언어와 문화까지 처음부터 고려와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발해는 우리들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총 인구의 5%라면 현재의 남북한 인구 8천만 중 4백만이고, 적어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의 5%는 발해인인 셈이다. 지난 1994년 발표되어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로 시작해 ‘나에겐 갈 수도 볼 수도 없는가 저 하늘로 자유롭게 저 새들과 함께 날고 싶어…’로 끝나는 그 넓고 푸근한 바다, 발해는 우리들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경기일보 - 201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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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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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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