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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잔뜩 성난 사람처럼/ 낡은 대문을/ 콰당! 발로 차고 가네// 바람은 때 이르게 핀/ 찔레꽃 덤불 마구 흔들어/ 꽃잎들 하르르 하르르 쏟아버리고 가네// 미지의 허공에 발길질하고/ 낯선 희망을 흔들며 짓밟고 가는/ 저런 순간들이 나는 두렵네. // 피는 꽃과/ 지는 꽃 사이/ 가시면류관을 쓴/ 슬픔의 얼굴이 언뜻 스쳤던가. // 봄의 대지를 말리러 온다는/ 꽃샘바람, / 얼굴 없는 슬픔으로 돌아선/ 젖은 눈자위도 뽀송뽀송 말려주려나. // 연두 깔리는 대지에도/ 설치류 이빨 같은/ 가시가 뾰족뾰족 돋는 사순절 무렵……” (고진하, 「사순절 무렵」) 겨울호 문예지에서 이 시를 읽었다. 오래 전부터 이 시인의 시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서 이 시가 눈에 띈 것은 아니다. 시인이자 목사라는 이력이 흥미롭다거나 특정한 종교에 매력을 느껴서는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한기가 스미는 십이월, 해넘이를 앞둔 즈음에 느닷없는 봄 이야기는 어색하고 낯설었다. 겨울호 특집란에 봄을 소재로 한 시를 발표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아닐뿐더러, 시인 또한 봄에 쓴 시를 묵혀두었다가 겨울에 낼 만하지 않다는 짐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무언지 모를 걸림이 있었다. 시의 첫 인상은 강렬하지도 특별히 새롭지도 않다. 그저 봄철 꽃샘바람 이야기이겠거니 하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읽다가 돌아보면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 속속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짚인다. 우선 첫 연에 등장하는 바람의 모양부터가 심상치 않다. 바람은 낡은 대문을 걷어차고 이르게 피어난 찔레꽃 덤불을 마구 흔들어서 꽃잎들을 ‘쏟아버린다’. 이 시가 단순히 짖궂은 봄바람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 아님은 “미지의 허공에 발길질하고 낯선 희망을 흔들며 짓밟고 가는”이라는 다음 구절에서 비로소 선명해진다. 바람은 모르는 것들 즉 미지의 것들과 낯선 것들을 일단 발길질 하고 짓밟고 지나간다. 무관한 것들에 대한 이유 없는 적의와 무차별한 폭력의 행사. 이것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 결과로, 이제 막 모든 것이 피어나는 시절인데도 ‘피는 꽃’은 금방 ‘지는 꽃’이 된다. 피어보기도 전에 그것들을 흔들고 쏟아버리는 ‘바람’ 탓이다. 그 짧고 허망한 소멸 앞에서 시인은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의 슬픔을 본다. 지난봄은 그렇듯 잔인하고 허망하고 참혹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겨울이 오고 한 해가 넘어갈 무렵까지, 봄에 ‘젖은 눈자위’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슬픔은 대지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응어리져 있다. 그래서 새싹들이 돋아나는 ‘연두 깔리는 대지’에는 새싹 대신 ‘설치류 이빨 같은 가시’가 뾰족뾰족 돋아난다. 시를 읽으며 무언가 덜거덕거렸던 것은 내 마음 어딘가에도 깊이 박혀있는 이 ‘가시’ 때문인 것이다. 새싹조차 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봄의 배반과 참혹, 그리고 망각. 이 시에는 참사 후에 발표되었던 시들과는 또 다른, 찬찬하게 되새김질되는 응어리진 슬픔이 있다. 한 해가 다 지나는 겨울에 이 시가 발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되새김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지나간 사건을 추모하거나 슬퍼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설치류 이빨 같은 가시’가 돋아나는 것은 사실상 지난봄이 아니라 다가올 봄의 이야기다. 멀지 않은 봄에, 땅 속에 묻힌 슬픔의 응어리들은 서로 뭉쳐 겨울을 나고, 얼어붙은 땅거죽을 뚫고 나와 가시처럼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 것이다. 그래서 잊혀져가는 기억들, 외면하고 싶은 마음들을 따끔거리게 하고 상처를 덧낼 것이다. 상처는 덮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환부를 드러내어 피고름을 짜내야 비로소 새 살이 돋는 법이다. 다시 맞이할 ‘사순절 무렵’에는 가시가 된 새싹들이 슬픔의 생생한 힘으로 무성하게 풀과 나무로 자라날 것이라고, 진정 그래야 한다고 되뇌어보는 아침이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 아닌가. 문혜원 아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5.1.1 중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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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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